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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믿음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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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

3월 22, 2022 by 한혜신 Leave a Comment

Asaph | 골로새서 1:3~6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들에 대한 기도와 그들로 인한 감사가 형식적인 것이 아님을 이유를 들어 말해주었다.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다양한 부품이 존재한다. 그런데 없으면 안 되는 부품들이 있다. 카오디오나 유리창의 재질이나 내부전등 혹은 시트의 쿠션 등은 자동차가 안전하게 움직이는데 결정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엔진이나 바퀴가 없다면 자동차는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골로새 교회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주요 부품들에 대해 바울은 전해 들었고 기뻐하며 하나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드렸다. 그 중요 부품, 없어서는 안될 기본적으로 교회가 갖추어야 할 것들을 살펴보면서 그것들로 주 님은 어떤 교회가 되기를 희망하시는지 주님께서 제시하신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배우고 그분의 뜻대로 나아가자.

1.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v.4).

믿음은 주 예수님의 교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 교회의 이름 역시 강릉믿음침례교회이다. 지난 7개월 동안 들려온 우리 교회에 대한 소식들은 좋은 소식도 있었지만, 나쁜 소식도 있었다. 즐거움도 있었지만, 고난도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결국 우리 교회의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지금까지 견뎌냈고 이겨내고 있다. 주님은 반드시 자신을 신뢰하고 따르는 이 믿음에 대해 칭찬하신다! 믿음은 교회의 기초이신 주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말해 준다. 믿음의 창시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믿음의 완주자, 완성자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과 관계를 시작한 사람의 인생길은 더 이상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길을 걷고 뛰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그것을 경주를 하는 경주자에 비유했다. (히 12:1) 그러므로 증인들이 이렇게 큰 구름을 이루며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2하)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지금도 육상경기장이 있듯이 바울이 있던 로마시대에도 있었다. 콜로세움이라 부른다. 거기서 경주자들이 트랙을 달린다.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관중들은 그 경주자들을 응원한다. 지쳐서 그만 뛰고 싶어도 경주자들은 응원을 받으면서 끝까지 달린다. 주님을 믿고 이 교회에 속하게 된 우리들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경주로를 함께 달리고 있다. 또한 주님께서 주신 각자의 경주로를 달린다. 교회 안에서 각자에게 맡기신 부분들이 있다. 각자의 재능에 맞게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신다. 그때 우리를 응원하는 관중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앞서 달려가서 경주로를 마친 경주자들이다. 구약 성경의 사람들과 신약성경의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이 완주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우리가 완주할 수 있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달리자!

골로새 교회 역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들의 경주로를 달렸다. 주님의 모든 교회의 공통된 경주로의 시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끝도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교회가 달리는 경주로의 출발자이시고 완주자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의 모임을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다. 믿음의 길에 올라서서 출발하려면 그분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을 바라본다. 어떤 분으로 바라보는가? (히 12:2)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 교회 역시 주님께서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신 분으로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우리 교회는 그분처럼 이 세상에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좇아가야 한다. 그 십자가 가운데 공통된 것은 수치이다. 부끄러움이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부끄럽게 하려고 온갖 애를 쓰고 있다. 바울이 사역을 시작하던 당시에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 사실 안디옥 교회를 멸시하는 이름이었다. 우리나라는 예수쟁이라고 놀린다. 주님의 이름을 욕으로 사용한다. 화풀이용으로 써먹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믿는 주님에 대한 믿음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러나 바울은 선포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롬 1:16) 부끄러움을 멸시하는 믿음이 우리 주 예수님처럼 믿고 예수님처럼 사는 실제 삶에서의 믿음이다!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선포하자!

2. 골로새 교회는 모든 성도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있었다(v.4).

골로새 교회는 주 예수님을 믿고 실제로 그분처럼 신실한 삶을 살았다. (골 1:2) “골로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과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 신실함은 각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주님을 믿는 신실함은 나아가서 성도들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이어졌다. 우리 교회는 지난해에 겪은 코로나의 어려움 중에서도 주님을 믿는 믿음이 드러났는데, 성도들을 사랑하는 사랑 표현이었다. 나는 마치 골로새 교회의 이러한 믿음과 사랑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의 마음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얼마나 감사해 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도 그 믿음과 사랑에 동참했다는 것에 주님께 감사했고 주님을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었다.

믿음은 결코 가만히 정지해 있지 않는다. 반드시 움직인다. 믿음이 살아서 역사하면 사랑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사랑의 동기는 주님께 대한 믿음, 주님을 향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내가 사랑하려고 내 힘으로 하는 사랑은 결국 끝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그 사랑의 힘과 권능을 믿는 믿음은 오롯이 참 사랑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채러티 사랑이다. 그 채러티 사랑은 하나님 자신을 말한다.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을 우리가 알았고 또 믿었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 채러티 사랑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이분은 세상 모든 것이 자신 것이지만 이 땅에 오셔서 그것들이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셨다. 오직 희생하시면서 그분은 자신이 그 사랑임을 보여주셨다.

주님이 사랑 자체이심을 아는 사람은 지체인 성도의 연약함을 채워주고자 한다. 성도가 잘못했을 때 일으켜 주고자 한다. 물심양면으로 말이다. 야고보를 통해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약 2:8) “너희가 성경 기록에 따라,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왕가의 법을 성취하면 잘하거니와”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떠나가라. 너희는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 하고는 몸에 필요한 그것들을 너희가 그들에게 주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느냐?” 17)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

지난 30년 전만 해도 집에 차 한 대 소유하고 있는 것이 굉장한 자랑거리였고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이 닫혀 지고 차가워지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사랑에 더욱 갈급해 한다. 겉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아니다. 그들에게 허전함이 있다. 심지어 주님의 교회에 속한 주님을 믿는 성도들 가운데서도 마음속에 사랑을 갈구한다. 자칫 형제, 자매의 관심을 추구하는 일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결국 심지어 교회를 떠나는 일로 이어진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자매를 사랑하되 그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가득 채워주고자 물심양면의 일을 계속 하자. 주님이라면 세상에 찌들어 있고, 육신에게 쉽게 자신을 내어주며, 마귀의 시험에 걸려 허덕이는 지체를 일으킬 수 있음을 믿고 주님의 사랑으로 일으켜주자!

3. 골로새 교회는 하늘에 쌓아둔 소망이 있었다(v.5).

골로새 교회는 주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그분으로부터 발현된 사랑을 베풀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아가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붙잡았다. 하늘에 쌓아둔 소망이라는 말의 반대는 땅에 쌓아둔 소망이다. 땅에다가 소망을 두는 일은 하나님 편에서, 즉 예수님 편에서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이 땅은 불로 해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뿐만 아니라 사람이 땅에 소망을 두고 땅에서 누리고 호위호식하기 위해 행한 이 땅에 벌여놓은 일들은 불로 해체되기 전에 이미 죽음의 때가 오면 하나도 가지고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후손의 후손이 누린다 해도 결국 그 모든 일들이 일순간 불로 해체되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주 예수님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풍성하게 퍼져나간다면 우리 교회는 골로새 교회와 같게 될 것이다. 바로 소망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두게 될 것이다. 내가 바라는 소망, 내가 확신하며 따라가는 소망, 내가 신실하게 나아가는 그 목표지점, 그 푯대는 하늘이 될 것이다. 저기 하늘에 바로 믿음의 창시자와 완성자이신 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저기 하늘에 완전한 사랑, 완벽한 사랑 그 자체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 팔을 벌리고 안아주시려고 맞이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망이 아니면 무슨 일이 이 땅위에 우리를 보람차게 할 수 있을까? 이 소망이 아니면 어떤 사람이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수 있을까? 정치인들의 감언이설에 속지 말자.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유명한 자들의 감언이설이 얼마나 거짓이 가득한지 알게 되었다. 언론이 사람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끌어안았다 차버렸다 하는 행실들에 대해 더욱 확고히 깨닫게 되었다. 제발 이 땅의 소망은 없다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자! 그 누구도 나에게 소망은커녕 희망조차 될 수 없음을 공포하자! 그리고 우리는 이 소망을 오직 복음의 진리의 말씀 안에만 두자! (골 1:5) “또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인함이니 이 소망은 너희가 전에 복음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들은 것이라.”

정리하자.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모든 성도들에게 베푸는 사랑에 관해 그 교회의 목회자였던 에바브라에게 들었다. 그들의 사랑은 넘쳤고 그 안에는 종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도 있었다. 빌레몬은 자신의 집을 골로새 교회에게 내어 줄 정도로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고 그분에 대한 믿음 안에 굳게 선 자였다. (몬 1:5) “[주] 예수님과 또 모든 성도들을 향해 네가 품은 네 사랑과 믿음에 관하여 듣기 때문이라.” (골 1:4)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들에게 너희가 베푸는 사랑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이요,” 골로새 교회의 사랑의 시작은 신실한 자들이 앞서 달려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목회자인 에바브라와 적어도 집사였을 법한 빌레몬은 주 예수님의 믿음과 모든 성도들을 향해 품은 사랑의 삶에 신실했다. 주님께서 골로새 교회에게 선물로 주신 이들을 통해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본이 되는 삶, 예수님의 모습을 닮는데 그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강릉믿음침례교회 역시 그러하기를 주님께서 간절히 바라셨고 지난 7개월의 담임목사 공백 기간에 주님의 바람에 교회 전체가 함께 하나가 되었다고 나는 의심할 수 없었다.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린다. 또한 앞으로 주님께서 더욱 우리교회를 들어 사용하실 것을 확신한다.

걷고 달리면 다리가 튼튼해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걷고 뛰는 일에 대한 열매이다. 그러나 한 두 번, 한달 정도로는 안 된다. 반드시 꾸준함이 6개월은 해야 열매를 보게 된다.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 교회의 경주로와 우리 각자의 경주로에서 어떻게 걷고 달리기를 원하실까? 자신이 기쁨을 향해 꾸준히 달린 것처럼 달리라고 응원하신다. 꾸준하지 못하도록 내 육신과 마귀와 세상은 그 경주에서 고단한 일과 심지어 수치스러운 일로 멈추라고 소리치고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이 땅에서 조차 보상할 것을 약속하셨다. 사람들이 안겨줄 것이라고 격려하신다. 나아가 하늘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받을 영원히 영예로운 보상을 기뻐하면서 완주하라고 응원하신다. (골 1:6)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있는 것 같이 너희에게 이르렀으며 너희가 그것을 듣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안 그 날부터 너희 안에서도 열매를 맺는 것 같이 열매를 맺는도다.” 주님의 기쁨을 위해 믿음과 사랑과 소망 안에서 열매를 맺는 우리 교회와 우리 가정이 되기를 주님이 응원하고 계신다!

<지난 2022-01-02 주일 오전 설교문>

Filed Under: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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