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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믿음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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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3월 30, 2022 by 한혜신 Leave a Comment

Asaph | 요한복음 1:19~28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가 존재함을 귀로 듣고 안다. 그 소리에 힘이 있음도 안다. 이것을 증명하려고 값비싼 첨단 장비를 동원할 필요는 없다. 사람의 일상이 증거물이다. 소리가 외쳐질 때 사람의 마음에 움직임이 일어난다. 우리는 많은 말소리들을 듣는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폰을 통해, TV를 통해 늘 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에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그 소리를 따를 것인가? 따르지 않을 것인가? 둘 중 무엇이든 상관없이 마음은 그 소리의 메시지로 인해 움직인다. 그리고 과연 그러한가 생각하고 따져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음이 정해진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이시므로 소리를 내신다. 그 소리를 내실 때 사람을 사용하실 때가 많으시다. 그분의 소리를 낸 사람이 본문에 나온다. 그 사람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의 길을 곧게 하도록, 빛을 증언하도록 부름 받았는데 바로 침례자 요한이었다. 그의 활동 무대를 생각해 보자.

1. 요한은 광야로 부름 받아 가서 외치면서 생활했다(v.23; 마 3:1; 막 1:4; 눅 3:2~3).

(요 1:23) 그가 이르되, 나는 대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하니라. (마 3:1) 그 무렵에 [침례자] 요한이 와서 유대의 광야에서 선포하여 2) 이르되,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막 1:4) 요한이 광야에서 침례를 주고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선포하매 (눅 3: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니라. 3) 그가 요르단 부근의 온 지역으로 가서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선포하였는데

침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소리쳤다. 광야는 큰 도시도 아니었다. 읍내도 아니었다. 장터도 아니었다. 그곳은 사람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의 없는 곳이다. 지나가는 행인만 있을 뿐이다. 왜 하필 그가 광야로 부름 받았을까? 그가 거기서 외친 소리의 내용은 많은 사람이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나? 그가 외친 소리는 그리 중요한 메시지가 아니었나? 그가 광야에서 외친 소리가 무엇이었나? 주의 길을 곧게 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의 침례를 받으라! 는 메시지는 하늘의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얼마나 중요했던가? 근데 왜 광야였나?

그 광야는 가까이 임한 하늘의 왕국과 극명하게 차이나는 땅의 왕국을 보여준다. 하늘과 땅 차이다. 하늘의 왕국은 한이 없지만, 이 땅의 왕국은 한정되어 있다. 하늘의 왕국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만, 이 땅의 왕국은 시간과 공간 속에 갇혀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요한을 광야로 인도하여 지금 이 세상은 하늘의 왕국에 비하면 마치 광야와 같음을 알려주고자 하셨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도시를 놔두고 이 광야에서 삶의 터전을 삼지 않는 것처럼 현 세상이 다가오는 세상에 비하면 아무 가치가 없음을 알려주시려고 광야에서 소리를 내셨던 것이다.

요한은 사람이 없는 이 황량한 곳에서 생활했다. (마 3:4) 바로 그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으며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 꿀이더라. (막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더라. 광야는 다양한 옷을 파는 옷가게가 없다. 다양한 음식들이나 여러 가지 메뉴를 만들어 파는 레스토랑도 없다. 그는 마치 구약시대에 대언자들처럼 특이한 옷차림이었다. 먹는 것도 도시에서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광야에서는 흔히 구할 수 있었다. 도시에 맞지 않고 광야 맞는 것들이었다. 요한처럼 말씀이신 주님의 길을 곧게 하면서 빛이신 주님을 증언하는 삶은 이와 같다. 결코 소돔과 고모라처럼 도시가 상징하는 이 세상과 함께 친구가 될 수 없다. 하늘의 왕국을 외치면서 땅의 왕국을 바라는 것은 모순이다. 산이나 무인도에 사는 자연인이라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일로 도시에서 나가 살지만, 요한은 개인의 목적이 아니었다.

2. 광야에 살게 된 이유(v.6~8)

그가 광야에서 살게 된 이유와 목적을 다시 보자. (요 1:6)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더라. 7) 바로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이것은 그 빛에 대해 증언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를 통해 믿게 하려 함이라. (요 1:8) 그는 그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해 증언하도록 보내어진 자더라. 어둠을 밝히는 빛을 증언하기 위함이다. 사망의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이 일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사명이다. 하늘의 왕국을 소리쳐 선포하는 일이다. 회개의 침례를 받으라고 외치는 일이다. 광야는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에 딱 알맞은 장소였다. 삶의 문제를 회피하고 떠나 사는 곳이 광야가 아니다. 큰 중병에 걸려서 치료하고 요양하기 위해 쉬러 가는 곳이 광야가 아니다. 요한이 가서 살게 된 광야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한 장소였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과 빛을 전하기 위한 장소였다. 오직 주님께서 일을 맡기시며 보내신 그 곳이 바로 광야이다. 나는 주님의 인도에 따르는 나그네의 광야에 있는가? 아니면 내가 머물고자 하는 정착민의 도시에 있는가? (히 11:13) 이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확신하며 끌어안았고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으니 잠깐 나그네가 되고 영원히 정착하자!

3. 광야에서 벌어진 놀라운 일들(마 3:5~6; 막 1:5)

참 놀라운 일이 그 황량한 벌판에서 벌어졌다. 사람이 없었고, 또 지나다니는 사람만 있을 법한 그 광야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려들었다. 사업 파트너가 될 만한 것이 전혀 0없는 옷차림과 그의 삶이었다. 메뚜기와 들 꿀을 먹는 그와 그다지 친구가 되고 싶지도 않았음에도 그에게 사람들이 달라붙었고 그가 전한 하나님의 소리와 메시지를 그들이 받아들였다! (마 3: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르단 사방의 온 지역이 그에게 나가 6) 자기 죄들을 자백하며 요르단 속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막 1:5) 온 유대 땅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에게 나가 자기 죄들을 자백하며 요르단 강 속에서 다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그가 외치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울려 퍼졌지만, 그 소리가 예루살렘에 흘러 들어갔다. 온 유대로 전해졌다. 요르단 강 사방의 온 지역까지 전달되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그가 외친 말씀이시고, 빛이시며, 생명이시며 곧 오실 주님을 믿고 회개의 침례를 받았다. 누가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을까? 거기는 광야였다. 밤이 되면 매우 추워지는 곳, 낮이 되면 매우 더워지는 곳. 살기에 너무 너무 좋지 않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나님은 환경을 뛰어넘으시는 분이시다.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실 때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벽과 한계를 뛰어 넘으시는 분이시다. (엡 3:20) 이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무엇이 우리가 광야의 나그네로서 하는 이 사명을 막을까?

4. 광야와 함께 그 놀라운 일들에 참여한 요르단 강(v.26, 28)

(요 1:26)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너희 가운데 서 계시니 28) 이 일들은 요한이 침례를 주던 곳인 요르단 건너편 베다바라에서 일어났더라. 황량한 광야에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생명체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물이었다. 요르단 강물이 광야와 접한 낮은 지역에서 흐르고 있었다. 하나님은 거기서 말씀이시고, 빛이시며, 생명이신 자신의 임재를 믿고 회개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라고 요한에게 명하셨다. 그 강물이 그들을 살리는 생명이 아니었다. 그 강물이 그들의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아니었다. 그 강물이 영이 죽은 자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말씀이 아니었다. 요한이 광야와 물에서 외친 주님이 그들을 회개에 이르도록 하셨고 그들을 살리셨다.

요한이 살았던 그 광야는 결코 요한을 죽이거나 요한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절망을 주는 장소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마치 숨겨진 진주가 있는 조개처럼, 깊은 산속에 숨겨진 산삼처럼 매우 귀한 것이 있음을 알려주는 요르단을 품고 있었다. 그 요르단은 지형적으로 옆에 있는 광야들보다 고도가 낮다. 그러므로 숨겨진 것처럼 보인다. 거기로 가기 위해서는 광야로 가서 그리고 내려가야 한다. 은혜를 대체하는 은혜이신 주님을 얻고 배우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내 자아를 매일 매순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럴 때 놀라우신 주님을 목격하게 된다.

5.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즉 주님만 집중하고 주님의 증인만 되자(v.19~23).

요한의 광야애서의 삶은 주님을 보면서, 주님과 교제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사람들이 그가 침례를 주던 요르단 건너편 베다바라로 찾아왔다. 그들은 광야로 오지 않았다. 강물로 내려오지도 않았다. 이들은 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회개의 침례를 받기 위해 오지도 않았다. 주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왔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았다. 요한이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동문서답을 했다. 그들은 주님이 오신다는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 요한 너는 누구냐? 라고 물었다. 그들을 보낸 바리새인과 레위사람들은 사람에게 집중하고 사람의 행태와 상황들에 골몰하는 삶을 살았다.

요한은 자신이 그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것 역시 그들의 동문서답에 따라서 말한 것이었다. 요한은 처음부터 자신의 신분을 말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집중하고 주님의 오심을 결코 기다리지 않았던 바리새인이나 제사장 당사자들이 아니었으므로 요한은 그들이 그리스도 주님께 집중하도록 도와주었다. 요한은 자신과 논쟁하려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소리와 메시지만을 고수한 나그네요, 순례자였다.

그러나 그 유대인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흔히 예수님께 했던 것처럼 사람에게 집중하기를 선택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네가 엘리야냐? 네가 그 대언자냐? 라고 계속 집요하게 논점을 벗어난 질문들을 하고 심문하듯 따졌다. 요한은 엘리야처럼 가죽 띠를 띠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엘리야가 아님을 말했다. 주의 날에 엘리야가 온다는 말라기의 예언이 있지만, 그것이 지금은 필요 없는 것임을 요한이 외친 소리들, 메시지들을 듣고 받아들인다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어느 때든지 그리스도께만 집중해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이 혼란한 시대를 만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주님과 관계에 주목하고 집중하면 어둠이 깔린 이 세상에 빛을 담대히 전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만들어오고 세워온 업적과 공적이 주님 앞에서는 언제든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우리도 요한처럼 외칠 수 있고 외쳐야 할 사명을 받았다.

그의 광야에서의 외침이 얼마나 크게 확성기처럼 퍼져 나갔던가! 주의 길을 곧게 할 때 거기 높고 화려하게 쌓고 꾸민 것들이 무너짐을 바리새인과 레위 사람들은 체험하며 두려워했다. 그리고 급히 종들을 요한에게 보냈던 것이다. (요 1:22) 이에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우리가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 자신을 가리켜 누구라고 하느냐? 하니 23) 그가 이르되, 나는 대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하니라. (사 40:3)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을 위해 큰길을 곧게 만들라.

국민의 대표 자리에 있는 대통령이나 옛날 왕들이 행차할 때 그 대로를 정비하는 것은 매우 상식적이다. 왕에게, 대통령에게 위험한 것이나 위협을 주는 존재가 없음을 확실하게 살핀다. 경호원들이 미리 사전 점검을 한다. 호위부대가 사주 경계를 한다. 그러나 요한이 외친 그리스도 주님, 왕들의 왕이신 그분은 우리에게 호위를 맡기지 않으셨다. 요한과 우리에게 주의 큰길을 곧게 만드는 일은 다만 우리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면 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리라, 하라. 고 선포하면 된다!

초청한다. 말씀이신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을 침례자 요한은 구약의 대언자들처럼 증언했다. 우리는 오셨던 주님과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주님 그리고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어떻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이 땅, 이 세상의 왕국들에 집중하지 않는다. 도시의 풍요로움에 집중하지 않는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명심한다. 인기 있고 매력적인 소리들에는 오히려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나그네의 삶을 살면서 금방 마르고 사라지는 풀과 꽃처럼 자신을 내려놓는다. 나아가 영원한 말씀이신 주님께 집중하여 그분만을 외치는 소리로 살아간다. 이후 반드시 그에 따르는 열매와 보상을 받되, 고난과 핍박과 함께 받으면서 최종적으로 오는 세상에서 우뚝 선다!

<지난 2022-01-12 수요일 저녁 설교문>

Filed Under: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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