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aph | 시편 13:1~6

다윗은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상황을 맞이한 듯하다. 교회,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통틀어 하나님의 이름이 먹칠 당하고 욕을 당하고 있다. 교회와 더불어 목사라는 직분이 과거 3,40년 전보다 그 이미지가 떨어지고 있다. 물론 정말 큰 죄악을 저지르는 부도덕한 교회와 삯꾼 목자들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매우 적은 극소수의 교회와 목자가 전체 이미지를 떨어뜨린 듯하다. 물론 이런 현상들이 그냥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만이 아님을 확신한다. 모든 세상 일이 하나님의 활동영역과 계획과 뜻 안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하고 시원한 해답을 주고 있으니 주님의 말씀에 주목하자.
1. 주께서 자신의 얼굴을 숨기신다고 느껴질 때(v.1-2)
다윗의 시편에는 원수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미 앞에 시편에 그 원수들이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시편 1:1부터 그 원수에 대해 설명하는데 경건치 않는 자, 조롱하는 자, 죄인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다윗의 원수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깨어지는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그 원수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원수이다.
다윗은 자신의 주위에 자신과 의견충돌을 일으키거나 자신과 오해나 마찰을 일으킨 자를 원수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자, 육신에 속하여 악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자, 고의적으로 주님을 모욕하는 자를 원수라 명명했다. 그들이 높아져서 사람들을 휘어잡으려는 행태에 큰 위기감을 느꼈다. 그들이 높아져서 심지어 일반사람들만이 아니라 주의 백성들마저 죄악과 범죄의 유혹으로 이끌려는 모습에 큰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나아가 부르짖었다! (시 13:1) 오 {주}여, 어느 때까지 나를 잊으려 하시나이까? 영원히 잊으려 하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어느 때까지 내게 숨기려 하시나이까? 2) 내가 어느 때까지 날마다 마음속에서 슬퍼하며 내 혼 안에서 계획하리이까? 내 원수가 어느 때까지 내 위로 높여지리이까?
그가 원수들의 치밀한 위협과 공격에 슬픔과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얼마나 그 당혹감과 위기감이 극에 달했던지 앞으로 어찌할 지에 대하여 자신의 혼 안에서 계획했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져있다. 다윗은 그의 영이 다시 태어났고 그의 혼이 구원받았으며 그의 몸이 구속받을 것으로 예정되어 있던 하나님의 자녀였다. 그래서 영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그분께 나아가면서 이 문제에 대해 토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혼 안에서 계획했다. 혼은 지식, 감정, 의지를 담고 있는데, 이것으로 주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영으로 경배하고 기도하며 영으로 주님의 뜻과 계획과 생각을 따라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약한지라 이렇게 나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욥 또한 그러했다. (욥 13:24) 어찌하여 주께서 주의 얼굴을 숨기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그의 고통과 슬픔은 그를 옥죄었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원수로 보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긍휼의 주님은 그를 다시금 영으로 교제하도록 이끌어주셨다. 그의 기도가 바뀌었음을 볼 때 확인할 수 있다. 주님이 우리의 삶에서 자신의 얼굴을 숨기신다고 우리가 느낄 때 경거망동 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감정적으로 치닫거나 그래서 몸을 마음대로 굴리지 않고 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2. 바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밝히신다(v.3-4).
(시 13:3상) “오 {주} 내 [하나님]이여, 나를 깊이 살피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나의 눈을 밝히소서… 주님은 고통과 슬픔 속에 있는 자신의 자녀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가 그 가운데 부족함과 연약함을 보도록 이끄시는 장면을 다윗을 통해 보여주신다. 사람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코로나 사태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당연한 것이다. 유한한 사람이고 언제 어디서든 죄 아래 놓일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가 사람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의 눈을 밝혀주시려고 항상 준비되어 있으시다. 영의 눈을 밝게 해 주시려고 하신다.
왜? 내 스스로가 감정에 치닫고 세파의 시달리면서 영적인 시야를 순식간에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시 13:3하)…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염려하며” 코로나로 인해 일단 일반적으로 세상이 생각하는 교회라는 단체가 언론 기사들 안에서 사회악으로 찍힘을 당했다. 지금 백신패스로 인해서 백신을 맞지 않는 사람들을 사회악으로 찍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원수들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다윗의 예를 통해 보여 주신다. 기도하자. 주님께 영으로 기도하자. 육신이나 혼의 감정으로는 결코 기도할 수 없고 주님이 듣지 않으신다. 영으로,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자.
주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생각에 계속 머물 수 없다. 자신의 계획으로 혼을 가득 채울 수 없다. 그 잠이 주님 주시는 사랑의 잠이 아니라 사망의 잠임에도 맘을 푹 놓고 쉴 수 없다. 주님께 영으로 기도하는 자는 바른 염려로 향해 나아갈 것이다. (시 13:4) “나의 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그를 쳐서 이겼다, 할까 염려하고 내가 흔들릴 때에 나를 괴롭히는 자들이 기뻐할까 염려하나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기도하는 자의 영의 눈을 열어주실 때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고 염려하는 삶으로 나아간다. 원수들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결코 타협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정비하는데 부지런하게 된다. 주님은 이것을 매우 기뻐하심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바빌론을 떠나 유다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한 뒤 얼마가지 않아 유다는 다시 이민족과 타협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에스라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에서 떠나는 모습에 마치 다윗과 같은 위기감과 당혹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울면서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었다. 그리고 놀란 채 앉았다가 저녁 희생물을 드릴 때 근심 중에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스 9:8) “이제 {주} 우리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남은 자를 우리에게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시고 또 자신의 거룩한 곳에서 우리에게 못을 주셨사오니 이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히시고 우리를 우리의 속박 가운데서 조금 소생시키려 하심이니이다.”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돌아온 일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완전하게 경험했던 큰 사건이었다. 나아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식민 백성임에도 가능했음 역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곧이어 눈이 어두워졌다. 영의 눈이 감겨버렸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과 타협했다. 이것은 히브리서에서 주님이 경고하신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만일 떨어져 나가면…” 이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자녀는 과거의 영적인 경험 속에서 현재를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갔다. 그리고 주님께서 회계장부에 넣어 계산하실 것이다. 내가 자꾸 과거의 영광을 생각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장부를 빼앗아 와서 계산하는 것처럼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주님께 영의 눈을 열어달라고 간구하면서 내가 주님의 진리와 은혜와 권능과 지혜안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위험한 상태가 아닌지 늘 점검받아야 한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내 가정과 내 교회가 그러한 상태가 아닌지 늘 점검해 달라고 매일 매순간 주님께 쉬지 않고, 멈추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선물을 주신다.
3. 긍휼과 구원이라는 관대함과 후대함으로 안식을 주신다(v5-6).
주님께서 나를 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고 심지어 영원히 잊으려는 것처럼 느껴질 때, 주님이 자신의 얼굴을 나에게 숨기려 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날마다 내가 마음속에서 슬퍼하며 내 혼 안에서 계획할 때 주님은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다윗은 주님께 그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토로하면서 나아갔을 때 주님의 이러한 마음속의 생각과 계획을 알게 되었고 그대로 간구했다. 그리고 그분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임을 다시 떠올렸다. 아무리 원수가 자신을 위협하고 가정과 주님의 백성의 모임을 넘어뜨리려 한다 해도 그분은 긍휼이 영원함을 다윗은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분의 긍휼에 다가 생활 속의 구원은 딸려오는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의 고통과 슬픔은 주님이 인정하시고 받아주시는 걱정과 염려와 근심으로 바뀌었고, 결국 기쁨으로 바뀌었다! (시 13:5) “그러나 내가 주의 긍휼을 신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이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주님의 긍휼에 구원이 따라오고 그 구원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주신다. 잠시 잠깐의 짜릿한 즐거움과 쾌락과는 차원이 다른 이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 얻는 구원의 기쁨을 경험해보자! 그러면 무한하신 주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계속 알아간다. (시 13:6) 내가 {주}께 노래하리니 이는 그분께서 나를 관대히 대하셨기 때문이로다.”
주님은 관대한 분이시다. 마음이 넓으신 분이다. 나의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완악함마저도 참고 기다려주시면서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이 코로나 시대에도 주님의 이러한 관대하게 대하시고 후하게 대우하시는 계획은 그치지 않는다. 계속 되고 있다. 시대가 바뀌고 변한다 해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
계속 멈춰 있을 수는 없다. 질병은 주님께서 통제하신다. 사람은 주님의 통제에 맡길 때 안전하다. 세상의 원수들은 주님의 백성인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다! 지옥의 문들이 주님이 직접 세우신 교회를 어찌 무너뜨릴 수 있는가! 다만 겁만 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생각 속에서 지치고 기진하여 쓰러지게 하려는 계략임을 주님은 계속 가르쳐 주고 계신다.
이러한 때 우리의 기도제목은 우리의 눈을 열어달라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매일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보고 깨닫고 삶을 주님의 말씀을 지키데 부지런해야 하겠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슬픔을 기쁨으로, 고난을 영광으로 바꿔주시고 피곤함을 안식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만큼 우리 주님은 자신의 자녀를 얼마든지 후대하시는 분이시다! 관대하게 대하시는 분이시다! (시 116:7) “오 내 혼아, 네 안식으로 돌아갈지어다. {주}께서 너를 후대하셨도다.” (시 119:17) “주의 종을 후대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살아서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지난 2022-01-02 주일 오후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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