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aph | 시편 14:1~7; 53:1~6

지난 시간에 시편을 통해 하나님의 원수가 된 자들에 대한 다양한 이름들을 들었다. 그 가운데 어리석은 자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 있다. (시 5:5) 어리석은 자들은 주의 눈앞에 서지 못하리니 주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모든 자들을 미워하시며 이다. 어리석은 자가 왜 주의 눈앞에 서지 못할까? 그것은 그가 불법을 행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어리석음은 단지 모름이나 무지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것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 지식을 사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함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어리석음이 드러나는 때는 하나님의 지식이 없을 때이다. 특히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 대해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부르신다.
1. 어리석은 자(v.1)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우리들 속에서도 있고, 모든 자연 만물에도 깃들어 있음에도 하나님의 실존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주님은 어리석다 라고 부르신다. 심지어 53편에서도 14편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신다. 거기에서는 마할랏에 맞춘, 즉 슬픔과 애곡의 곡조에 맞춰서 노래할 정도로 매우 안타까움을 다윗은 53편에서 드러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계속 하나님은 없다 라고 하나님에 대해 무시하고 경시하며 멸시하고 있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할 때, 겉으로 드러내기보다 마음속으로 먼저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의 생각과 계획과 뜻과 목적을 담고 있다. 그리고 양심이 거기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양심은 하나님의 실존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없다! 라고 선언할 때부터 그 양심은 더럽혀진다. 양심이 작동하지 않도록 양심에 무엇인가 위해를 가한다. 성경에서는 이런 어리석은 자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딤전 4:2)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신자든 불신자든 사람들은 ‘나는 양심에 가책을 받는다.’ 혹은 ‘너는 양심이 있나?’ 라고 말하며 양심이 각 사람 안에 존재함을 인정한다. 그래서 양심(conscience)은 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know with God)이라는 영어적인 뜻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양심으로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에 대한 지식을 숨길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양심에 가책을 받지 못하는 상태를 그렇게 표현하셨다. 마치 살을 뜨거운 인두로 지지면 감각이 죽어버려서 아무 촉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 양심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다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아직 모르고 있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 모두는 인생에 처음으로 양심에 가책을 받는 날을 맞이한다. 그날은 자신 스스로도 자신이 죄를 범했음을 인지하는 날이다. 나는 8살쯤,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즈음에 내 심장이 몹시 쿵쾅쿵쾅 뛰어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너무나 갖고 싶은 장난감 코끼리가 있었는데, 그 몸속에 머리와 다리들을 집어넣으면 계란처럼 되는 장난감이었다. 문방구에 들어갔다. 그리고 주인의 눈을 살피면서 그것을 몰래 옷 속에 넣었다. 내가 얼마나 주인의 눈을 잘 피했던지 주인은 계산대에서 자신을 지나쳐가던 나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장난감을 가지고 집으로 왔던 내 마음은 불편하고 또 불편했다. 그때 인생 처음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훔치기 전에는 갖고 싶고 재미있게 가지고 놀고 싶었던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서 도저히 가지고 놀 수 없었다. 어리석게 되었다.
하나님이 계심에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쿵쾅쿵쾅 뛰는 자신의 양심을 인두로 지지고 있다. 그들이 변명하고 핑계 대는 논리나 철학이나 학문이나 심지어 과학이라고 말하는 근거들이 바로 그 인두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없다 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있다 하는 양심을 그것들로 지지면서 양심이 말하는 것을 억누르고 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2. 부패하고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v.1)
이렇게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 세상 체계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어리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부패하고 가증한 자라고 부르신다. 부패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음식물 쓰레기를 생각해 보면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악취가 난다. 즉 그들은 마음속에서 악취가 발생한다. 겉으로 향수를 뿌려서 향기가 난다하더라도 그 부패한 마음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하나님이 없다! 라고 마음속으로 선포하는 이들에게서 하나님이 맡으시는 냄새는 악취이다. 그들이 아무리 사회에서 공헌을 해도, 민족을 번영으로 이끌더라도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게 하지 않는다. 아니 이게 무슨 냄샌가 하시며 그 더러운 쓰레기를 당장 치우시도록 만들 뿐이다.
그리고 그 쓰레기 냄새로 인해 그들을 가증하게 여기신다. ‘가증하게 여기다’는 구토를 유발한다는 말이다. 내 딸이 많이 고되고 피곤했는지 이삿날 저녁에 먹은 것들을 다 토해냈다. 두 차례 게워내고는 속이 좋아졌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자가 치료하도록 설계하셨다. 몸속의 세균이나 바이러스, 독소들을 몸 밖으로 배출하여 몸 안이 부패되지 않고 정결하게 되도록 우리 몸을 놀랍게 만드셨다.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더 그러하실까? 하나님은 결코 어리석은 것과 부패한 것들을 감지한 이상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 가증하게 여기시고 반드시 언젠가는 그 모든 부패한 것을 처리하시고 처단하신다. 이것은 사람이 청소하는 것과 같은 유익한 일이다. 대신 그들 주위에서 악한 영향을 받고 있는 주님의 거룩한 자녀들을 보호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이며 진리이다.
3. 선을 행하지 않는 자(v.1, 3)
어리석은 자는 마음속이 부패하고 가증함으로 인해 선을 행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자선사업을 하든지, 가난한 아이들을 돕든지 그런 선행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없는 채로 하는 그 모든 의롭게 보이는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 UN 평화유지군이 세계의 분쟁 지역으로 들어가서 질서를 유지한다고 언론들을 통해 보도하고 홍보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그 일을 한다고 보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를 고수하기 위함이라고 홍보하지 않는다. 혹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정하신 질서를 수호하는 목적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자신들이 국가와 민족과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종교를 뛰어넘고 초월하면서 그 일에 헌신한다고 자신들을 찬양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그 선행으로 스스로 구원하라 선포한다.
하나님이 없이 해 아래에서 하는 그 모든 일은 헛되다고 전도서의 기자인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은 전달해 주셨다. (전 1:2) 선포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자기의 모든 수고에서 무슨 유익을 얻으리요?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전 12:13) 우리가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온전한 의무이니라. 14) [하나님]께서 모든 은밀한 일과 더불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모든 일을 심판하시리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을 없다 할 것이고, 그 마음은 사람들을 향해 선을 행하려 하지만, 그것의 결말과 결과는 전부 위선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그들은 참 선이시고, 전혀 어둠이 없이 깨끗하시며, 죄가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선이 아니라 악을 행하고 모두 다 치우쳐서 다 함께 더러운 자로 살아 가다가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당하고 있다. (시 14:2) {주}께서 깨달은 자나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 보시려고 하늘에서부터 사람들의 자녀들을 내려다보셨으되 3) 그들이 다 치우쳐서 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4. 불법을 행하는 자(v.4)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인데, 그들의 특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먹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핍박을 가하고 위협을 가하며 타협을 제안하여 지배한다라는 의미이다. 나아가 그들은 겉으로 법을 지키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불법의 계획을 꾸미고 그것을 이루려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타협안을 제시한다. 하나님을 끌어들인다. 예수님도 끌어들인다. 성령님까지 끌어들인다.
이쯤 되면 그들 가운데 가장 큰 세력으로 이 지상을 거의 통치하다시피 하는 단체가 떠오를 것이다. 바로 로마 카톨릭이다. 그리고 그녀와 연합한 모든 단체들이다.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종교통합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들이 있다. 보통 개신교회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성경의 교리와는 다르다. 결코 {주}를 부르지 않는다. 그들의 {주}는 다름 아닌 마귀 사탄이다. 사탄이 빛의 천사로 가장하듯 그들 또한 그렇게 하고 있다. 세상 모든 왕들과 대통령들이 교황을 떠받들고 있음을 언론 보도들의 하나같은 멘트, 앵무새와 같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 마치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듯 하나님이 없다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는 교황에게 그렇게들 하고 있다. 바울은 교황 위에서 지시하는 존재인 적그리스도를 불법의 신비라고 했다. (살후 2:7) 불법의 신비가 이미 일하고 있으나 다만 지금 막고 있는 이가 길에서 옮겨질 때까지 막으리라.
5. 이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지혜로운 자들을 드러내셔서 심판하심이다(v.5~6).
1절부터 4절까지가 하나님이 없다 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속이 현실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진짜 모습이다. 아무리 자신을 꾸미고 치장해도 냄새나고 부패하여 하나님께서 토해내시는 가증한 자들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감탄할 정도로 그들이 희생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이 죄악이고 불법이라고 하신다. 이들에 대한 결론은 심판뿐이다. 그 심판 전에 반드시 하나님은 하나님은 계신다! 라고 선포하는 자들을 드러내 보이신다. 그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고 지혜로운 자들이다. 그들은 이 땅에서 세력을 얻고 부유하며 온갖 명예와 인기를 얻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가난한 자들로 다윗은 시편에서 표현했다. 이 하나님의 의로운 자들의 세대는 재물도 고만고만하고, 사회에서 세력도 크지 않다. 그렇다고 인맥이나 사람들의 주위를 끌만한 매력적인 요소도 없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지혜로운 자들, 선을 행할 수 있는 의로운 자들, 그리고 자신의 백성이라고 제시하고 싶어 하신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 가운데 좌정하여 그들을 위협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부터 보호하고 계신다. 이들을 이 멸망할 세상에 자랑하신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들에게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하신다. (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들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들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신 것을 너희가 보거니와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고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당황하게 하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29) 이것은 어떤 육체도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러한 주님의 뜻과 계획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주님을 찬양하자! 그분의 이름을 드높이자! 주님께 감사를 드리자!
정리하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로운 자들을 택하셔서 불의한 자들에게 큰 두려움의 심판이 있도록 하신 실화를 기억하자.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다. 역사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많은 민족들에게 큰 두려움이 되었는가! 세겜에서 벧엘로 올라갈 때 이스라엘과 그의 아내들과 자녀들은 수십 명에 불과했지만, 주위 도시들 위에 하나님의 두려움이 임하여 그들을 공격할 수 없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그 큰 이집트조차 심판으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 더 이상 그들을 붙잡고 있지 못했다. 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도 가나안의 민족들과 주위 민족들의 마음이 다 녹을 만큼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훗날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지만, 식민 백성임에도 고토로 돌아와 성전과 성벽과 문들을 재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제국들에게 두려운 심판들을 집행하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가나안 땅에서 흩어져 1900년 넘게 돌아가지 못했지만,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국가가 1948년에 그 땅 위에 재건했음은 역사상 그 어떤 민족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이스라엘은 어리석은 자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받기도 했지만, 또한 그것을 세상에 전하곤 하는 특이한 백성이다.
주님이 세우신 또 하나의 특이하고 특별한 백성인 우리, 주님의 교회 역시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성경이 실제 이루어짐을 교회를 통해 본다. 이들은 구원이 시온에서 나왔음을 믿고 있고, 장래에 그렇게 될 것도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완전히 주님께 돌아온 이스라엘과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할 그날이 얼마나 놀라울까!
<지난 2022-01-09 주일 오후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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