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aph | 골로새서 1:7~8, 4:12; 빌레몬서 1:23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이송되어 로마에 2년간 붙잡혀 있었는데, 그가 갇힌 곳은 쇠창살이 있고 더러우며 차가운 감옥이 아닌 가정집과 같은 셋집이었다. (행 28:30) 바울이 자기 셋집에서 만 이 년을 거하며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바로 여기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것들을 가르쳤는데, 그를 지킨 로마군인조차도 그가 거기서 사람들과 만나 복음과 진리를 전하는 일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골로새 교회 목회자인 에바브라도 그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바울에게 가서 전달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인가! 우리를 사용하실 때 사람의 생각과 이해와는 다르게 일을 성취하신다! 그분께 내 마음과 삶을 다 내어드리면 그렇게 하신다. 오늘 바울과 만난 에바브라 안에서 그렇게 행하심을 보겠다.
바울은 에바브라가 전한 골로새 교회에 관한 소식을 듣고 에바브라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평가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인준하신 평가였다. 바울은 에바브라에게 어떤 다양한 수식어를 붙이며 그를 칭찬했는가?
1. 에바브라는 사랑하는 동료였다(v.7).
목회자들 사이에서 사랑을 주고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동료였다. 전임사역자라고 해서 같은 동료들인 사역자들로부터 항상 이런 평가를 받지는 않는다. 매우 이상한 사역자들도 존재한다. 사람마다 있는 개성의 문제가 아닌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당부를 실행하지 않는 목자나 전임사역자도 존재한다. 오로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면서 목사라는 직분을 갖기도 한다. 그런 사람은 동료일 수는 있어도 사랑하는 동료라고 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에바브라는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여러 사역자들과 사랑을 주고받는 동료였음을 바울이 증언했다. 그 사랑은 다름 아닌 주님의 사랑임에 틀림없다. 참 사랑이신 주님이 빠진 사랑은 한계에 부딪히고 결국 그것이 한 순간에 끝이 난다. 전임사역자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모든 형제, 자매들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이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지체들 모두는 주님의 무한한 값을 치르고 사신 너무너무 큰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이를 믿는다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동료들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결코 무겁지 않다. 개개인이 독립적인 삶을 살지만, 또한 그 사람들을 불러서 서로 지체가 되게 하신 주님의 큰 계획에 따라 사랑해야만 한다!
서로가 사랑하는 표현 방법과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사랑의 동기와 출발은 우리 주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희생이다. 에바브라는 목자들 사이에서 그 사랑을 주고받았으며 나아가 주님의 양들인 골로새 교회와도 주고받았다. 나도 에바브라와 같이 목사님들과 사역자님들뿐만 아니라 우리 강릉믿음침례교회 여러분으로부터 우리의 사랑하는 한혜신 목사님이라고 평가 받고 평생 그렇게 살길 원한다. 이를 위해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2. 에바브라는 종이었다(v.7).
여기서 종은 우선적으로 주님의 종을 말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다. 교회를 섬기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섬기는 종이다. 에바브라는 이 종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음이 바울과 동료 일꾼들 사이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증명되었다. 그는 종이었으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무익한 종이었다. 성경에서 무익한 종을 두 번 언급하고 있다. (마 25:30) 너희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둠 속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 무익한 종은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께 이와 같이 평가 받았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한 가짜 목자, 삯꾼 목자, 혹은 거짓 교사, 거짓 그리스도인이 받을 마지막 평이다. 그러나 또 다른 무익한 종은 아직 심판의 때가 오기 전에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 하며 주인의 뜻 앞에 온전히 무릎 꿇는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그 모든 일들을 행한 뒤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이다. 우리는 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하였나이다, 하라, 하시니라. 바로 에바브라가 이러한 종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종의 모습은 주인 앞에서 굽신굽신하는 모습, 자신의 의지와 바람을 내세우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 모습, 모든 명령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종의 모습을 굴종이라고 표현한다. 이 무익한 종은 주인의 모든 명령을 수행했고 열심히 그 일들을 하여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대가를 주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결코 그런 바람은 꿈에도 꾸지 않는다. 단지 그는 주인이 맡긴 의무를 완수함에만 만족하는 종이다. 거저 받은 인생임을 인정하는 종이다. 우리 모두가 그러하지 않는가? 주님께서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긴 일에서 주님께 그 일을 했다고 주님께 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지? 에바브라가 동료들 사이에서도 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면 그의 삶은 무익한 종의 삶이었다. 즉 그의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 의무를 다한 것으로 만족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무익한 종의 삶이 어떻게 교회에게 평가되었는가?
3. 에바브라는 양들에게 주님을 가르쳐준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였다(v.7).
목자가 양에게 좋은 풀이 있는 풀밭으로 데리고 나가서 먹이는 일은 너무너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일에 신실함이 요구된다. 비바람이 불어도 정해진 시간에 최선의 양식이 있는 곳을 양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골로새 교회는 신실한 목자의 신실한 인도에 따라서 영적으로 자랄 수 있었다. (골 1:6)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있는 것 같이 너희에게 이르렀으며 너희가 그것을 듣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안 그 날부터 너희 안에서도 열매를 맺는 것 같이 열매를 맺는도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모든 성도들에게 베푼 사랑과 하늘에 쌓아둔 소망 안에서 주님의 양들은 자라나서 생명을 낳았다. 또한 어린 양들을 양육하도록 훈련받았다. (골 1:10) [주]께 합당하게 걸어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나고
에바브라가 그렇게 목자의 일, 즉 양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가르치는 일에 신실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의 사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책을 가르치지 않았다. 사람의 사상이나 철학, 처세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세상의 풍조와 유행이나 트렌드에 따라 변화무쌍한 목회 방식으로 교회를 이끌지 않았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인 성경을 양식으로 먹여주었다. 예수님의 생각과 지식과 지혜를 가르쳤다. 변함없으셔서 어제나 오늘이나 장래나 항상 같으신 주님을 가르쳐 준 사역자였다. 더군다나 지식으로만 가르치지 않았다. 머리에 주입하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양들의 마음속에서 주님만을 떠올리도록 자신이 먼저 주님을 배우는데 신실했다. 그리고 목자의 삶에서 주님의 모습이 솟아나왔다. 그에 대한 세세한 평가들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성경에 에바브라에 대한 구절이 네 구절밖에 없는데? 구절만이 아니라, 그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단어들은 많다. 사랑, 동료, 종, 그리스도, 신실, 사역자 나아가 성령이라는 단어까지 일곱 개 모두 엄청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 에바브라는 성령의 사람이었다(v.8).
에바브라는 사람의 목자이기 전에 성령의 목자였고, 사람들과 동료이기 전에 성령님과 동료였으며, 사람의 종이기 전에 성령의 종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바울에게 전한 골로새 교회에 관한 내용 중에서 바울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사랑이었다.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에 관한 사실을 전해 주었을 때, 특히 그들의 사랑에 대해 밝히 알려주었다고 8절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성령의 열매가 있었다. (갈 5: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그의 목회가 목회자들에게 인정받게 되고 성도들에게 인정받게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가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하나님은 목회자만 성령 충만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교회 전체가 성령 충만하길 원하신다. 교회가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길 원하신다.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그 일에 깨어 있고 (유 1:20)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너희 자신을 세우며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고 주님은 우리가 각자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길 원하신다. 왜냐하면 이 길만이 이 땅에서 우리가 주님께 인정받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잠시 즐기면 하늘에서 우리는 영원히 정착하는 삶을 살게 된다. 선교사님, 5년만 우리말 고생하시면 평생 편합니다.
에바브라는 사랑하는 동료 종이었다, 주님의 양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였다, 주님의 양들에게 다른 것이나 존재가 아니라 주님에 대해 가르쳐준 사랑이 충만한 교사였다, 그렇게 그가 주님과 교회에게 좋은 평판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다시금 강조함은 그의 일상이 성령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그가 성령의 사람임을 더욱 분명하게 얘기해 주는 부분이 골로새서 끝부분에 나온다. (골 4:12) 너희에게 속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종인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너희를 위해 항상 기도로 뜨겁게 수고하나니 이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완전하고 완벽하게 서게 하려 함이라.
골로새 교회에게 속한 에바브라, 그리스도의 것이었던 에바브라는 바울과의 만남과 교제 후, 그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가 사는 목적과 그가 하는 일의 목표는 골로새 교회에 맞춰져 있었다. 골로새 교회를 위해 항상 기도로 뜨겁게 수고한 자였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시간과 힘이 들어간다. 기도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기도가 수고임을 알 것이다. 마음을 다해서 온전히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기도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잡념이나 욕심이나 심지어 처리하지 않은 죄의 문제나 다른 사람을 향한 쓴 뿌리를 가진 채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눈감고 몸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마음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물체의 움직임이나 속도가 높아지면 열이 발생하듯이 기도하는 마음도 뜨겁게 된다.
에바브라가 항상 기도로 뜨겁게 수고한 이유는 그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완전하게 서게 함이었다. 나아가 양떼가 완벽하게 서도록 함이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의 기도이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육신 안에서 기도하게 된다. 육신은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교회를 완전하게 서지 못하게 한다. (롬 8:6)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으므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갈 5: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곧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욕심으로 하는 기도를 받아주실 리가 없다. 에바브라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양들이 잘 되기만을 바랐다. 이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마음이었고 바람이었다. 주님의 마음에 나를 맞추는 자가 성령의 사람, 성령의 소유이다. 성령의 사람은 어떤 복잡한 공식을 가지고 살지 않고, 심플한 삶을 산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각하고 계획하여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로 뜨겁게 수고한 이 에바브라를 본받자!
정리하자. 이러한 에바브라가 로마에 갇혀 있던 바울을 찾아 갔다. (몬 1:23)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된 에바브라가 네게 문안하며 그가 사실상 구류 중이던 바울을 찾아 방문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보라. 그는 바울과 함께 갇히기로 작정하고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전달하러 갔다. 목숨을 걸었다. 막상 가보니 지하 감옥이나 혹은 죄수들만 모아놓은 감옥과는 달리 어떤 사람들도 그와 만나기 위해 그의 셋집에 드나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 2년 동안 바울을 통해 계속 일을 하고 계심을 목격했다. 지금 우리도 만 2년을 코로나와 마스크로 인해 생각과 입이 갇혀 있다. 그러나 이런 고난과 고통의 시절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바울과 에바브라는 확신하고 오히려 그 상황에서 주님의 높으신 뜻만이 드러나길 원했다. 그리하여 우리 손에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옥중서신 –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 가 들려 있다.
사랑하는 동료 종, 신실한 그리스도의 사역자, 교회를 사랑하고 먹인 목자 에바브라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그 어떤 고난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주님의 모습으로 본을 보였다. 에바브라와 같은 주님께 온전히 헌신된 사역자들이 적은 지금 이 시대를 보고 있다. 서울침례신학교에 전임사역자로 헌신한 학생이 단 한 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다. 5~10년 안에 교회들의 목자들이 될 후보생들이 적다. 이를 위해 우리 교회가 나서서 기도해야 한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일깨워 주시도록 말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이 일에 물심양면으로 단순하고 기쁘게 주님께 드린다면 주님은 반드시 종들을 주실 것이다. 성령의 사람, 신실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주실 것이다. 그래서 강릉을 중심으로 동해안의 도시들과 인접한 도시와 군에 목자들을 파송하시는 놀라우신 주님의 역사를 기도하자!
<지난 2022-01-09 주일 오전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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