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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믿음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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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이 없는 자의 놀라운 자격

4월 7, 2022 by 한혜신 Leave a Comment

Asaph | 요한복음 1:26~27

침례자 요한은 유대인들의 물음에 적절한 대답으로 그들의 논쟁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 논쟁에서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이 땅에서 사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이제 곧 오실 그리스도, 메시아를 받아들이도록 그분을 소개했다. 유대인들이 그를 논쟁 속으로 몰아간 마지막 내용은 네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대언자도 아니면서 침례를 주느냐? 즉 네가 침례 줄 자격이 있느냐 라고 따졌다. 그 대답이 오늘 본문구절이다. (요 1:26)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너희 가운데 서 계시니 27) 곧 내 뒤에 오시지만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라.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노라, 하더라.

그들은 요한이 침례 주는 자격과 권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 했지만, 요한은 단지 자신이 사람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결국 그 일 조차도 오실 그리스도,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일임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만 3번이나 강조했다. (요 1:15) 요한이 그분에 대해 증언하며 외쳐 이르되, 내가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서신 것은 그분께서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라, 하며 언급한 분이 곧 이분이라, 하니라. 30) 내가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께서 나보다 앞서신 것은 그분께서 나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이라, 하며 언급한 분이 곧 이분이라.

오늘은 그가 증언한 이 말에 주목해 보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노라. 신발 끈을 풀어주는 일은 이 시대에서 살펴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일은 그 당시 종들이나 노예들이 주인에게 하는 일이었다. 굳이 찾아본다면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인데, 그렇다고 군화 끈을 묶어주지 않았다. 선임의 군화를 후임이 닦아줄 뿐이었다. 과거형을 쓰는 이유는 지금 군대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노예제도가 합법화 되어 있던 당시였다. 요한의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이 그리스도 앞에서 종도 될 수 없다 라는 뜻이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난 뒤에 요한처럼 저렇게 주님에 대해 소개할 수 있을까? 주님 앞에서 나의 자격과 나의 출신, 배경, 모든 지위를 다 내려놓을 수 있을까? 요한처럼 주님 앞에서 노예보다 더 못한 개나 소나 가축처럼 취급할 수 있을까? 그만큼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뛰어나시고 나의 전 생애와 영원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임을 자랑하고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이켜 보라고 신발 끈을 소재로 보여 주셨다. 나는 주님의 신발 끈 매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고 단지 그분 앞에 설 자격만 있다면 만족할 수 있을까?

요한은 자신 뒤에 오시는 사람, 6개월 차이가 나지만, 동생인 자를 이렇게 까지 모실 수 있는 이유를 몰랐다면 얼마나 원통했을까? 그러나 그분께서 그러한지 잘 알고 있었다. 요한은 자신이 그분의 종도 노예도 아닌 개와 소 같은 자라고 해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분이 그럴만한 자격과 지위에 대해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분은 자신보다 앞서신 분, 자신보다 먼저 계셨던 분이셨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계셨던 분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성경에서 ‘안다’ 는 말은 지식적인 것만이 아니다. 관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아담이 이브를 알았다’ 라는 말을 보면, 그것은 그 두 사람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 자녀를 낳고 가정생활을 한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아담과 이브가 가정 안에서 육체와 정신과 영의 일들을 함께 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다는 말은 그분과 교제를 하고 그분이 하고자 함에 함께 동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요한도 사람이었고 얼마든지 유대인들을 자기 힘과 지혜로 누르고 이길 수도 있었지만, 주님을 아는 것을 우선순위를 두고 집중했다. 주님과 교제를 통해 확신을 갖게 된 주님의 뜻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나아갔다.

심지어 요한은 다가올 위협이 예상 되었지만, 주님의 뜻 안에서 가만히 멈추고 계속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각 계 각층에게 전해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유대교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와 정치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다. (마 3:7~10)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중의 많은 자들이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그가 보고 그들에게 이르되, 오 독사들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게 하더냐? 왜 침례자 요한은 침례 받으러 나오는 그들에게 이렇게 혹독하게 그들을 꾸짖었을까?

일반 세상 사람들도 곧 잘 이렇게 말한다. 정치인들은 썩었어. 그리고 대형교회 목사들은 썩었어. 일반 사람들의 말을 너머서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인 성경에서 벗어나는 행태들이 세대를 거쳐 와도 계속해서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일반 사람들은 종교통합이 훈훈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정답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기독교계는 종교통합은 반대해도 교회통합은 대형교회 지도자들이 공적인 방송에서 나와서 지지한다. 이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오셨을 때로 간다면 과연 반가워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과 똑같은 헤롯은 지혜자들이 다녀간 직후에 두 살 아래 남자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침례자 요한이 외친 그리스도의 오심을 들은 후 첫 반응은 두려움과 적대감이었다. 왜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가? 자신들이 누려온 권력과 권세가 빼앗기게 될 것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침례자 요한처럼 겸손한 척하기로 했다. 그리스도의 밑으로 들어가는 척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드러난 이후부터 본색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껏 누려온 특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몰두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당시에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적대 관계였다. 마치 지금 우리나라의 우파와 좌파와 같았다. 교리적으로 바리새인은 모세오경을 믿었으나, 사두개인은 믿지 않았다. 바리새인은 천사의 존재와 기적, 부활을 믿는 근본주의였지만, 사두개인은 전부 믿지 않는 자유주의였다. 정치적으로 바리새인은 민족주의였지만, 사두개인은 반국민주의였다. 싸우고 헐뜯는 사이임에도 하나가 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놀라운 역사이다. 이것이 침례자 요한이 아는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증했는지 그가 말하는 독설에서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눅 3:7) 그때에 그가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이르되, 오 독사들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게 하더냐?

그들과 같이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사람을 두려워함은 결코 주님 앞에 설 자격이 주어지지 않음을 선포했다. 그들이 얼마나 잘 꾸미고 숨기며 자신들의 악랄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지 우리 역시 정치권과 종교계를 보면 훤히 알 수 있다. 겉으로는 지키지도 못할 공약들을 남발하고, TV화면에서는 선행을 한다고 자신들을 포장하고 다닌다. 어떤 이는 국민 모두에게 배당금을 줘서 모두가 잘 살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결코 전하지 않고 자신을 전한다. 주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라고 전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 모든 종교를 다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권력과 권세를 얻으려고 저기 가서 저 말하고, 여기 와서 이 말을 한다.

이와 같이 사람의 외모를 중시하는 행태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을 요한은 선포했다. 권력층인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했다. (마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눅 3:8상)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침례 받기 전에, 즉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받으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호통을 쳤다. 자기 마음과 자기 생각에서 돌이키는 회개 없이 주님 앞에 설 자격이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두 번째로 요한이 전한 메시지는 혈통과 가족을 중시하는 자들이 대상이었다. 그것 역시 주님 앞에 설 자격을 얻지 못한다고 선포했다. (마 3:9) 너희 속으로,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로 있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을 일으키실 수 있느니라. (눅 3:8하) …너희 속으로,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로 있다, 하고 말하기 시작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께서는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을 일으키실 수 있느니라.

사람은 자꾸만 자기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악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 한다. 남 탓을 한다. 잘되면 자기 탓 못되면 조상 탓, 그러나 반대로 자신이 의로워지려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더 악랄한 습성이 있다. 그래서 요한은 사두개인들보다 바리새인들에게 더 큰 화가 있음을 말했다. 바로 조상을 끌어들여 의롭게 여기려는 시도가 그들에게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오경을 믿고 심지어 대언자들의 글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심이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다. 많이 받은 자들에게 많이 요구함은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봉급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책임과 의무가 요구된다. 주님에 대한 지식을 알아서 그분께 많은 은혜를 받고, 많은 사랑을 받았음을 아는 지도자들에게 주님은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이런 점에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가지고 주님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드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부심 이상의 특권을 얻는데 몰입하여 살았다. 그래서 이방인들이나 혼혈인들을 깎아 내리고 터부시 하며 그들을 개나 돼지같이 여겼다. 요한은 이들을 무엇과 비교했는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돌에 비유했다. 그들은 돌보다 못했다. 왜냐하면 그 돌은 움직이지는 못해도 적어도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주 하나님 앞에서 의로웠던 조상들로부터 가르침 받고 이어받은 그 의로운 것들을 바르게 활용하지 못했다. 결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 (마 3:10) 이제 또한 도끼가 나무들의 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느니라. (눅 3:9) 이제 또한 도끼가 나무들의 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느니라, 하니라. 각 사람의 행위를 보시는 주님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내세우는 이 같은 행위는 주님 앞에 설 자격이 주어지지 않음과 동시에 그들의 모든 행위들이 다 불태워지고 없어질 가짜 공로와 가짜 선임을 요한은 선포했다. 특히 이 일을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하심을 선포했다. (마 3:11) 참으로 나는 회개에 이르도록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있으시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나를 자격도 없노라.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 12) 곧 손에 키를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사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껍질은 끌 수 없는 불로 태우시리라, 하니라.

이 코로나 시대에 대한민국의 6만 여 개의 교회들 가운데 만 여 개의 교회들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재정적으로 힘든 처지에서 그런 결정을 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주님의 교회라면 돈으로 버티고 유지하는 세상의 회사나 사업체가 아님을 믿는다. 그래서 이 사태를 통해 주님께서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시는 마지막 심판 때의 계획을 잠시 시연하고 계시는 거라 믿는다. 마치 백신패스, 방역패스가 7년 대환란의 주님의 계획을 시연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부르면서 바리새인처럼 위선과 기복신앙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가짜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확실히 보여주셨다. 그 교회들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 한가운데 있느니라 고 현재형으로 약속하신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없는 교회는 가라지 임을 보여주셨다.

피 흘린 발자취라는 책이 있다. 그리고 뱁티스트 브라이드 교리의 책들도 있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제발 침례교도, 침례성도라는 이름표를 교회가 가장 높여야 하는 예수님의 이름보다 높이는 우를 범하지 말자! 침례교회라고 해서 다 주님의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됨을 기독교 침례회에 속한 교회 사이트에 들어가서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여자 목사, 여자 집사가 교회를 리드하고 단상에서 나와서 설교하고 가르친다. 주님께서 성경에 쓰셔서 가르치신 내용과는 반대로 나아감에도 그들은 남자보다 은혜롭다고 한다. 과연 그 은혜는 누가 주는 은혜일까?

초청. 침례자 요한을 통해 주님은 회개하라 명하신다. 주님의 신발 끈 풀 자격은 없지만, 주님 앞에 서게 된 자격만이라도 감지덕지하고, 감사하며 섬기라고 하신다. 섬기되 담대히 주님의 진리를 가감 없이 선포하여 주님을 드러내고 소개하라 하신다. 지금 나의 일상이 주님이 우선인지, 사람이 우선인지 살피고 돌이키라고 명령하신다. 모두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를 받는 양이 되자. 오직 목자장이신 주님의 인도만을 받는 하위목자인 내가 되도록 기도하자. 모두 사람의 인도, 사람의 전통, 사람의 혈통과 가족이 아니라 오직 진리이신 주님만을 따라가자!

<지난 2022-01-19 수요일저녁 설교문>

Filed Under: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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