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ip to primary navigation
  • Skip to main content
  • Skip to primary sidebar
강릉믿음침례교회

강릉믿음침례교회

  • Home
  • 교회 안내
    • 교회 소개
    • 우리의 믿음
    • 기쁨의 소식
    • 교회 사역
    • 섬기는 분들
    • 모임 장소
  • 하나님 말씀
    • 설교
    • 칼럼
  • 교제와 나눔
    • 교회소식
    • 교회사진방

주의 장막과 주의 산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4월 5, 2022 by 한혜신 Leave a Comment

Asaph | 시편 15:1~5

장막은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집이다. 안식처이며 쉼터이다. 외부의 척박한 환경에서 보호할 수 있는 피난처이다. 우리가 집 안에 있을 때와 집 밖에 있을 때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특히 추운 겨울에는 집이 얼마나 큰 보호와 안식을 제공하는가? 유목민의 장막은 우리와 같이 온돌이 없어도 위로 올라가는 더운 열을 최대한 아래에 머물 수 있도록 한 구조이다. 그래서 몸시 추운 바깥은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온 몸이 떨면서 열을 일으켜야 하지만, 장막 안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머무를 수 있고, 거할 수가 있다. 즉 편히 쉴 수 있다.

1. 주의 장막과 주의 산의 배경

본문에 다윗은 주의 장막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의 거룩한 산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 장막은 다름 아닌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성막이며 그 산은 예루살렘에 있던 다윗의 도시, 곧 시온 산이다. 그 장막과 그 산에 주 하나님께서 계셨던 것이다. 주님과 함께 머물고 주님과 함께 거하는 피난처와 안식처가 그것들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속박에서 나온 직후에 주의 장막을 만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려고 모세를 통해 자신의 장막을 만들 것을 주문하셨다. 그 장막은 성막이라 부르고 그것은 하늘에 있는 모형을 땅에다가 본 따서 만든 하늘에 있는 성막 본체의 그림자였다(히 8: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과 교제하며 그들에게 쉼과 힘을 주시려고 성막을 지으셨다. 주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삶에서 지치고 힘들어 피곤하여 쓰러질 때가 있음을 하나님은 잘 아셨다. 그러므로 하늘의 쉼과 하늘의 힘으로 그들을 일으키고 회복시켜 주시고자 성막을 만드셨다. 다윗은 이 시를 통해 세상에서는 어떤 건축가도 지을 수 없는 완전한 보안과 완전한 휴식을 보장해 주는 주의 장막을 소개해 주고 있다.

이 안전한 집, 평안한 집이 위치한 곳은 주의 거룩한 산, 시온 산이었다. 시온은 다윗이 왕이 된 직후 여부스 족속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낼 때 차지한 곳이다. 산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실은 hill 즉 언덕이다. 언덕은 산 보다 낮은 동산이나 구릉을 의미하는데 높은 산은 물을 대기 어렵지만, 이 언덕은 깊은 물 저장고를 파서 물을 댈 수 있는 나지막한 곳이다. 그러므로 천혜의 요새로 사용하기 좋은 곳이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탈취할 때 그 언덕을 가장 먼저 탈취하는데 공을 들였다. 이미 여부스 족속이 거기에 그들의 요새를 짓고 버티고 있었지만, 다윗의 장군인 요압이 선봉장이 되어 탈취했다. 시온은 다윗의 도시이자 이스라엘의 번영과 중흥의 중심 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언덕을 주의 산, 주의 언덕으로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뒤에 오래전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곳으로 삼으셨다.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 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무너지고 함락되고 만다. 다윗은 시온 산을 주의 거룩한 산이라 표현하면서 주께서 자신과 함께 하셨으므로 주님으로부터 승리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음을 시편 15편 1절을 통해 간증했다.

2. 주의 장막과 주의 산은 거룩한 곳이었다.

거룩한 산이라 함은 그 어떤 산이나 높은 산과도 완전하게 구분되는 곳임을 보여준다. 주의 장막이 바로 다윗 시대에는 바로 이 주의 거룩한 언덕에 있었다. 그 장막, 성막이 거룩함으로 인해 그 다윗의 도시인 시온 산도 거룩할 수 있었다. 다윗은 시온 요새를 탈취한 뒤에 가장 먼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 하나님을 시온으로 모셔오려고 했다. 다윗의 마음은 거룩하신 분을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 모시려는 거룩한 마음을 가지길 원했다. 단지 안전하고 편하려고 주님을 끌어들이는 기복신앙이 아니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일까?

그래서 다윗은 당시 성막과 주의 궤는 기브아의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다. 다윗은 그 모든 것들을 가져오려고 했다(삼하6:1~4). 다윗은 음악을 주 앞에서 연주했다(삼하6:5). 얼마나 기쁜 일인가? 다윗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면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재판하는 일, 즉 주님이 주신 일을 바르게 수행할 수 있음을 믿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동반된 거룩한 일을 실행할 때 다윗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한 번에 주의 궤와 성막을 가져오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방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의 궤를 레위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고 소들이 모는 수레에 실었던 것이다. 또한 그 궤를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레를 따라가던 사람들 중에 웃사가 손을 대었고 그는 즉사하고 말았다. 다윗은 유일한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시는 주 하나님을 모시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큰 진노를 먼저 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다윗은 두려움에 빠졌고 주의 궤를 예루살렘의 시온으로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건이 벌어진 곳에서 돌려서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가져가도록 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는데 하나님께서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다윗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주의 궤를 다시 가져올 수 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방식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바로 거룩한 방식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드디어 다윗은 자신의 집보다 더 확실한 안전과 힘을 주는 주의 장막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산보다 더욱 깨끗하고 정결한 주의 거룩한 산에 거하며 쉴 수 있었다. 주님이 계시는 그 어떤 곳이든 거기는 주님과 교제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주님이 계시는 곳이 어디든지 거룩하고 정결한 곳이다. 그분께서 계신 곳에는 그 어떤 불의가 있을 수 없다. 마음속으로 거짓을 꾸밀 수도 없다. 그것이 2절의 내용이다. (시 15:2) 곧바르게 걷고 의를 행하며 마음속으로 진리를 말하는 자,

다윗이 주님의 장막과 궤를 두 번째 옮길 때, 전과는 다르게 주님의 거룩한 방식에 따랐다. 다윗이 곧바르게 걷기를 선택했을 때 주님과의 교제에 문제가 없었고 더 이상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곧바르게 걷다’ 라는 말은 실제 삶을 하나님의 방법과 방식대로 산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길들은 비뚤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각자가 세운 기준들이 다르다. 그래서 서로 자신이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들의 삶의 방식과 방법은 결국 사망의 길들이야 라고 말씀하신다. (잠 14: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 (잠 16:25)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 다윗이 곧바르게 걸어 의를 행했을 때 그는 주님과 함께 안전하고 깨끗하며 편안한 집과 산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다윗은 주님과 그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서 교제할 때 결코 불의 가운데 마음속으로부터 거짓을 가지고 주님을 대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빛이신 주님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려고 한다. 복음을 전하러 나가서 전도지를 주면 슬쩍 보고는 예. 아~ 예. 라고 무심코 대답하고 줄행랑을 친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전도지를 받은 적이 있고 복음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지만 난 안 믿어요. 라는 말이 그 예. 예. 안에 들어 있다. 어떤 분들은 교회 나가요 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구원받으셨는지,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지 물으면 아니,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라고 하는데, 이것은 궁금해서 알려고 하는 질문이 아니다. 따지려는 질문이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들은 주님과 교제가 없거나 관계조차 없기 때문에 이런 답변을 하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뿐만 아니라 믿는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바울도 언급했다. 너희의 예는 예라 하고, 아니오는 아니오 라 하라, 우리 주님의 자녀들 역시도 마음속으로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서 주님 안에서 쉼을 얻고 안전을 얻을 수는 없다. 속이려는 마음과 거짓된 마음으로 어떻게 거룩하신 주님과 교제할 수 있을까? 거기는 주의 장막일 수가 없다. 거기는 주의 거룩한 산일 수가 없다. (레 11:44, 45, 19:2)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그런즉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너희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여 거룩할지니라. (벧전 1:16) 기록된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느니라. 마음속에서 진리를 말하고 진실을 품어서 거룩함에 이르자!

3. 거룩한 장막과 거룩한 산에 있는 자는 이웃 앞에서도 거룩한 혀로 말한다(v.3)

(시 15:3) 혀로 헐뜯지 아니하며 자기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 이웃을 모욕하지 아니하며

특히 사람과 살면서 우리의 거룩함이 드러난다. 마음이 주님 앞에 항상 진실하여 거룩함을 유지하는 사람, 곧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자신 앞에 있건 자신 앞에 있지 않건 헐뜯지 않는다. 헐뜯는 것은 사람의 단점과 약점을 제 3자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피난처와 안식처에 머물고 거하는 자는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다. (레 19:16) 너는 네 백성 가운데서 소문을 퍼뜨리는 자처럼 여기저기 다니지 말고 또 서서 네 이웃의 피를 대적하지 말라. 나는 {주}니라.

우리는 이 소문이 칭찬과는 동떨어진 말임을 알 수 있다. 이웃을 헐뜯고 모욕하는 말을 퍼뜨리는 것이 과연 이웃에게 어떤 피해를 줄까? 바로 이웃의 피와 관련 있다. 피는 생명이다. 헐뜯는 소문이 이웃의 생명을 해치는 일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피와 관련하여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분이다. 생명을 해치는 일에 대해 주님은 매우 민감하시다. 피 흘리게 하는 일에 대해 결코 눈감고 있지 않으신다. (시 34:12) 생명을 원하고 많은 날을 사랑하여 좋은 것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냐? 13) 네 혀를 지켜 악에서 떠나게 하고 네 입술을 지켜 교활한 말에서 떠나게 하며 15) {주}의 눈은 의로운 자들 위에 머무르며 그분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열려 있도다.

내가 거룩한지, 거룩하지 않은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생각해 보라. 내가 나쁜 일이 생겨 힘이 들 때,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고 손해를 보았을 때,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를 떠올려보라. 그때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이웃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가볍게 대하는가? 아니면 존중하는가? 그것은 그때 그들에게 하는 말에서 드러난다. (엡 4:25) 그런즉 거짓말을 버리고 각 사람이 자기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 우리는 서로 지체니라. 주의 장막과 주의 거룩한 산에 머물고 거할 때, 혼자서 누릴 것 같으면 주님이 다윗을 통해 이 시편을 쓰지 않으셨다.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말을 부풀리고 왜곡하지 않고 오직 진실과 진리를 택하여야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쉼과 힘을 얻을 수 있다.

나아가 내게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을 때, 뭔가 일이 잘 안 풀려 손해를 볼 것 같을 때,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을 것 같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출 23:1) 너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지 말며 사악한 자와 손을 잡고 불의한 증인이 되지 말라. 2) 너는 군중을 따라서 악을 행하지 말며 소송에서 재판을 굽게 하려고 다수를 따라서 기우는 말을 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의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어제 청소와 정리를 끝내고 교제하면서 말했던 부분이 우리나라의 문화였다. 다수의 사람들이 가는 모습을 따르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편하게 느낀다. 그러나 문화가 진리는 아니다. 문화도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잘못되면 거룩함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문화들이 어떤 면은 진리에 부합된다. 그러나 진리와 동떨어진 많은 부분이 이 세상 각 민족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정리 : 주님은 다윗의 시를 통해 자신과 함께 머물고 거하는 자들의 특징을 설명해 주고자 하셨다. 그 첫 시작은 거룩한 자신과 함께 머물고 거하길 원하는 그 마음이다. 곧 주님과 교제하길 원하는 마음이다. 아주 절친한 친구와 교제하면 기쁘고 즐겁다. 마음이 잘 맞는 동료와 함께 주고받는 시간이 소중하고 귀하다. 그 시간에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생각이 정리되기도 한다. 요즘 같은 시절에는 얼굴을 보며 잘 만나지 못하지만, 전화 통화만이라도 이런 경험을 하곤 한다. 하물며 거룩하시고 완전히 깨끗하신 주님이 나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생명을 버리시기 까지 나를 사랑하시면서 나와 교제하자고 하신다. 깊은 교제, 깊은 대화를 나누자고 매일같이 아침에 그리고 순간순간에 나에게 마치 전화로 연락하는 친구와 같이 연락하고 계신다. 나는 거룩한 마음으로 통화버튼을 눌러서 받으면 된다. 이것은 성경을 열고 읽으며 묵상하는 것이다. 주의 장막과 주의 거룩한 산은 더 이상 예루살렘과 다윗의 도시인 시온 산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주어졌다. 우리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본체와 실체가 주어졌다! 주의 장막, 곧 성막은 내 맘속에 주인으로 좌정하신 주 예수님이시다. 주의 거룩한 산, 시온 산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강력한, 난공불락의 요새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거룩하시다. 진리이시다. 그리고 은혜이시다. 우리는 마음속에 계신 그분과 함께 머물고 거하며 이 땅의 고난과 어려움을 견디며 승리하자!

<지난 2022-01-16 주일오후 설교문>

Filed Under: 칼럼

Reader Interactions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imary Sidebar